한강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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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강은 고려 시대의 문신으로, 국자시와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어사, 금주 수령 등을 역임했다. 둔전 정리를 통해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예부낭중, 공부시랑, 간의대부를 거쳐 국자감대사성이 되었다. 이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며 1275년 지공거로 문과를 주관하고, 밀직사사, 좌상시 등을 역임했으며, 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1284년에는 『고금록』 편찬에 참여하고, 1288년 첨의시랑찬성사로 승진 후 치사했다. 1296년에는 충렬왕에게 종묘 수리, 백성 구휼 등을 건의했으며, 1303년 76세로 사망하여 문혜라는 시호를 받았다.
한강은 1243년(고종 30) 국자시에 합격하고 문과에도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감찰어사, 금주 수령, 예부낭중, 공부시랑, 간의대부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2][3][4] 1271년(원종 12)에는 국자감대사성으로서 인재 선발에 참여했다.[2]
2. 생애
1275년(충렬왕 원년) 좌복야로서 과거 시험을 주관했고, 이후 지밀직사사, 1277년(충렬왕 3) 세자첨사부 조호, 1279년(충렬왕 5) 밀직사사, 좌상시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2][4] 1281년(충렬왕 7)에는 원나라의 일본 원정 준비를 지원하고, 쿠빌라이 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원에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다.[5]
1282년(충렬왕 8) 판삼사사로 재직 중 왕명으로 재추소사존을 설치하여 국정을 주도했다.[4] 1284년(충렬왕 10)에는 『고금록』 편찬에 참여했고,[5] 1286년(충렬왕 12) 다시 과거 시험을 주관했다.[2]
1288년(충렬왕 14) 첨의시랑찬성사로 승진 후 치사(致仕)했으나,[5][6] 왕은 그를 다시 여러 요직에 임명하고 재차 치사시켰다. 1296년(충렬왕 22) 왕에게 종묘 수리, 시장 물품 강매 금지, 유기된 시신 매장, 사냥놀이 중지, 백성 진휼 등을 건의하고, 불교를 통해 국운을 융성하게 할 것을 조언했다.
1303년(충렬왕 29) 76세로 세상을 떠났고, 문혜(文惠)라는 시호를 받았다. 손자 한영이 원에서 높은 관직에 오르면서, 원으로부터 벼슬을 추증받았다.[4][7]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1243년(고종 30) 국자시(國子試)에 합격하고,[2] 이후 문과에도 급제하였다. 거듭 승진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가 금주(金州)[3] 수령으로 나갔다.
한강이 부임하기 전에는 전답의 조세를 정해진 액수대로 채우지 못해 파면된 수령들이 많았다. 하지만 한강이 부임한 후 둔전(屯田) 가운데 못 쓰게 된 것을 정리해 곡식 2천여 석을 더 수확하게 되니 향리들과 백성들이 모두 화목하고 안락하게 되었다.
이에 치적이 최고라고 하여 조정에서 불러 예부낭중(禮部郞中)에 임명되었고, 이후 공부시랑(工部侍郞)과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냈다.[4] 1271년(원종 12)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으로서 양순(梁淳) 등 53명을 선발하였다.[2]
2. 2. 주요 관직 역임과 정치 활동
1243년(고종 30) 국자시(國子試)에 합격하고, 이후 문과에도 급제하였다.[2] 거듭 승진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가 금주(金州)[3]의 수령으로 나갔다. 한강이 부임하기 전에는 전답의 조세를 항상 정해진 액수대로 채우지 못해 파면된 수령들이 많았는데, 한강이 부임한 후 둔전(屯田) 가운데 못 쓰게 된 것을 정리해 곡식 2천여 석을 더 수확하게 되니 향리들과 백성들이 모두 화목하고 안락하게 되었다. 이에 치적이 최고라고 하여 조정으로 불러들여져 예부낭중(禮部郞中)에 임명되었고, 이후 공부시랑(工部侍郞)과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냈다.[4] 1271년(원종 12)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으로서 양순(梁淳) 등 53명을 선발하였다.[2]
이후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다가[4], 1275년(충렬왕 원년) 좌복야(左僕射)로서 지공거(知貢擧)를 맡아 문과를 주관해 최지보(崔之甫) 등 26명을 급제시켰으며,[2] 이듬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임명되어 재추의 반열에 들어갔다.[4]
1277년(충렬왕 3) 세자첨사부(世子詹事府)에 새 관직이 설치되었을 때, 초대 조호(調護)에 임명되었고, 1279년(충렬왕 5) 밀직사사(密直司使)로 승진했으며, 이듬해 좌상시(左常侍)를 겸임했다.
1281년(충렬왕 7) 백성들이 일본 원정을 위한 군마(軍馬)의 사료 공급으로 고난을 겪자, 충청도(忠淸道)·교주도(交州道)에 파견되어 이를 비축했으며, 원에 성절사(聖節使)로 파견되어 쿠빌라이 칸의 생일을 축하했다.[5]
이듬해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옮겼는데, 당시 양부(兩府)가 국사를 결정할 때마다 모두 눈치나 살피면서 나서서 주관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왕이 처음으로 재추소사존(宰樞所司存)을 설치하고 이를 한강과 밀직사부사(密直司副使) 김백균(金伯均)에게 맡겼다.[4]
1284년(충렬왕 10) 감수국사(監修國史) 허공(許珙)·수국사(修國史) 원부(元傅)와 함께 자신도 수국사로서 『고금록 古今錄』 편찬에 참여했고,[5] 1286년(충렬왕 12) 다시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서 지공거를 맡아 문과를 주관해 이부(李榑) 등 31명을 급제시켰다.[2]
1288년(충렬왕 14)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로 승진했고[5], 같은 해 치사(致仕)[6]했다가, 후에 왕이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수문전대학사(修文殿大學士)·감수국사·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세자사(世子師)로 벼슬을 올려 주고 다시 치사시켰다.
1296년(충렬왕 22) 왕이 한강에게 종묘 수리, 악기 정비, 시장 물품 강매 금지, 유기된 시신 매장, 산 동물 방생, 도살 금지, 사냥놀이 중지, 진수성찬 절제, 혹한기·혹서기 백성 진휼 등을 건의받았다. 또 한강은 왕에게 옛 사찰 중수를 요청하며, 『법화경 法華經』, 특히 「수량품 壽量品」을 숭상하면 수명을 늘릴 수 있다고 조언했다.
2. 3. 재추소사존 설치와 국정 주도
1282년(충렬왕 8) 한강은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옮겼다. 당시 양부(兩府)가 국사를 결정할 때마다 모두 눈치만 살피며 주관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왕이 재추소사존(宰樞所司存)을 처음 설치하고 한강과 밀직사부사(密直司副使) 김백균(金伯均)에게 맡겼다.[4]
2. 4. 학문적 업적과 『고금록』 편찬
1284년(충렬왕 10) 감수국사(監修國史) 허공, 수국사(修國史) 원부와 함께 수국사로서 『고금록』 편찬에 참여했다.[5]
2. 5. 충렬왕에게 올린 건의
1296년(충렬왕 22) 왕이 한강을 불러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이에 한강은 종묘를 수리하고 악기를 갖추어서 때마다 지내는 제사를 예법대로 엄숙히 지낼 것, 모든 관아에서 시장에 나온 물건을 헐값에 강제로 사들이는 일을 금할 것, 유기된 시신들을 매장하며 산 동물을 방생하고 도살을 금할 것, 사냥놀이를 중지하고 진수성찬만 먹는 것을 절제할 것, 혹한기와 혹서기 때 미음과 죽을 마련해 배고픔과 목마름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진휼할 것 등을 건의했다.[4]
또 이어서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
2. 6. 말년과 죽음
1288년(충렬왕 14)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로 승진했고,[5] 같은 해 치사(致仕)[6]했다. 후에 왕이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수문전대학사(修文殿大學士)·감수국사·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세자사(世子師)로 벼슬을 올려 주고 다시 치사시켰다.
1296년(충렬왕 22) 왕이 한강을 불러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이에 한강은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또 이어서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
1303년(충렬왕 29) 76세로 졸하자 왕이 문혜(文惠)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후에 손자 한영(韓泳)[7]이 원에서 하남부총관(河南府摠管)까지 지내며 부귀를 누리자, 원에서 첨태상예의원사(僉太常禮儀院事)·고양현백(高陽縣伯)에 추증되었다.[4]
3. 가족 관계
한강의 아들에 대한 기록은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 자료 | 아들 |
|---|---|
| 『고려사 한강전』 | 한사기(韓謝奇), 한보(韓潽) |
| 『죽계 안씨 3자 등과시 서문』[10] | 한사기(韓謝奇), 한사겸(韓謝謙), 한보(韓譜) |
| 『청주 한씨 세보』[11] | 한사기(韓謝奇), 한사보(韓謝譜), 한사수(韓謝壽) |
가장 시대가 가까운 『죽계 안씨 3자 등과시 서문』의 기록을 따른다.
참조
[1]
서적
고려사
1331-01-01
[2]
서적
고려사 선거지
[3]
문서
지금의 경남 김해시
[4]
서적
고려사 한강전
[5]
서적
고려사 충렬왕세가
[6]
문서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일
[7]
문서
장남 한사기(韓謝奇)의 차남.
[8]
서적
한강 준호구
[9]
문서
원에서 추증한 관직이다.
[10]
서적
동문선
[11]
간행물
청주 한씨 족보
1617-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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